* 제88회 정기산행
* 남한산성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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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漢山城) 국가 사적 57호로서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을 지키던 남부의 산성이었다. 지금은 동, 서, 남문루와 장대, 돈대, 암문, 우물, 보, 누, 등의 방어 시설과 관해, 군사 훈련 시설 등이 있다. 이 산성의 주변 지역에는 백제 초기의 유적이 많이 분포되어 있어서, 일찍부터 온조왕대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신라 문무왕12년(672)에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로서 현재 남한산성이 위치한 곳이라고 믿어져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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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으나 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둘레가 3,993보이고, 성내에는 군자고가 있고, 우물이 7개인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또한 성내에 논과 밭이 124결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대대적인 개수를 본 것은광해군 13년(1621) 후금의 침입을 막고자 석성으로 개축키 시작하였으나 준공치 못하고,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1624년(인조 2년)이다. 인조는 총융사 이서에게 축성할 것을 명하여, 2년 뒤에 둘레 6,297보, 여장 1,897개, 옹성 3개, 성량 115개, 문 4개, 암문 16개, 우물 80개, 샘 45개등을 만들고 광주읍의 치소를 산성 내로 옮겼다. 이때의 공사에는 벽암 각성대사를 도총섭으로 삼아 팔도의 승군을 사역하였으며, 보호를 위하여 장경사를 비롯한 7개의 사찰이 새로 건립되었으나, 장경사만이 현존한다. 그 뒤 순조때에 이르기까지 각종의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 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을 완비한 것으로 손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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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축성의 목적을 대변해 주듯이 유사시 임금이 거처할 행궁이 73칸 반의 규모이고, 하궐이 154칸이나 되었다. 1798년(정조 22년) 한남루를 세우고 1642년에 세운 객관인 인화관을 1829년(순조 29년)에 수리하였다. 관해로는 좌승당, 일장각, 수어청, 제승헌을 비롯하여, 비장청, 교련관청, 기패관청 등의 군사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또한 종각, 마구, 뇌옥, 온조왕묘, 성황단, 여단 등이 이루어졌고 승도청을 두어 승군을총괄하였다. 남한산성의 수어는 처음에 총융청이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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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지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때 수어사인 이시백은 서성을, 총융대장 이서는 북성, 호위대장 구굉은 남성, 도감대장 신경진은 동성 망월대, 원두표는 북문을 지켰다. 그러나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수항단 으로 나가 항복하였으나, 외침에 의하여 정복당한 적이 없는 성이다. 그 뒤 계속적인 수축을 하여 경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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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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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위에 설치하는 구조물로 적의 화살이나 총알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낮게 쌓은 담장을 말한다. 이 여장은 다른 용어로 여담, 여첩, 치첩, 타, 여원 이라고도 하고 고어로는 성각휘, 성가퀴, 살받이터 등으로 불려졌다. 또한 설치하는 목적에 따라 치폐, 첩담, 비예, 희장 이라고도 하였다. 여장의 종류에는 평여장과, 凸형여장, 반원형여장 등으로 구분된다.평여장은 타와 타 사이에 타구를 설치하고 크기가 일정한 장방형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남한산성의 여장은 1940타 이며 모두 평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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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타의 길이는 남한산성의 경우 위치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1타의 길이는 대략 3 ∼ 4.5m 정도이며 여장의 높이는 낮은 곳은 70cm, 높은 곳은 135cm 정도이다. 타와 타 사이의 타구의 폭은 30cm이고 타구의 높이는 56cm로 대략 여장높이의 1/2정도이다. 여장의 폭은 76cm이고, 타와 타 사이의 간격은 15cm 정도이나 중앙부를 형태로 뾰족하게 처리하여 좁지만 상대적으로 넓은 면적의 조망이 가능하도록 하여 방어의 효율성을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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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여장의 경우 급경사지역의 일부지역에서는 경사면의 중간에 단을 두어 계단과 같이 축조하였으나, 대부분의 경우 단을 두지 않고 바닥의 경사면과 평행하게 여장을 설치하였다. 이 경우 여장의 높이가 전체적으로 일정하게 되어 방어의 효율성은 있지만, 여장을 쌓을 때 양력이 아래로 쏠리게 되어 여장 축성시 어려움이 있고, 안정성에도 문제가 있다. 일반적인 여장의 경우 체성벽의 상단에 미석을 설치하고 여장을 쌓는 것이 일반적이다. 미석은 체성벽에서 3치 정도 밖으로 돌출하도록 하였는데, 체성벽 맨 윗단의 높이를 일정하게 맞추는 역할과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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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남한산성의 경우 이러한 미석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축성시 미석을 설치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남한산성 여장의 경우 당초 벽돌로 축조하였으나 영조 20년(1744)에 벽돌을 제거하고 기와로 덮었으며, 정조 3년에는 다시 원성을 수축하면서 기와로 덮었던 것을 치우고 전돌로 개축하였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여장은 대부분 전돌로 쌓은 것이며, 부분적으로 타와 타 사이의 타구에는 수키와를 한 장씩 횡방향으로 올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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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여장을 보면 성벽의 정상부에 지대석을 놓고 그위에 20-30cm 정도의 활석으로 약 30cm 정도 허튼층 막쌓기로 쌓고 그 윗부분에는 방전을 사용하여 쌓고, 내부에는 생석회 잡석다짐을 하였으며 정상부에는 옥개전을 덮었다. 여장의 1타에는 3개의 총안이 설치되었다. 세 총안의 가운데에는 근총안을 설치하고, 양쪽에는 원총안을 하나씩 설치하였다. 총안의 간격은 대략 96cm 정도이며, 총안의 크기는 폭22cm, 높이 24cm이다. 성벽외곽의 경사도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근총안은 경사도가 38도, 원총안은 22도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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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형적으로 외곽의 경사도가 높은 능선지점에는 여장의 총안외에도 체성벽의 상단부에 별도의 총안을 설치하기도 하여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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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원사의 불경궤짝 <산성설화>
남문 근처에는 1986년 말에 복원된 개원사라는 절이 있다. 이 절은 옛날부터 불경을 많이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한번에 아주 많은 양의 밥을 지을 수 있는 무게가 200근이 넘는 큰 놋동 4개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 절에서는 귀중한 불경 궤짝을보관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얽힌 이야기가 매우 신기하다. 조선 인조 때의 일이다. 한 척의 배가 서울 삼개 나루에 닿았다. 그런데 그 배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다만 불경을 담는 궤짝만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궤짝 위에는 '중원개원사간'이라는 글자가 새겨 있었다. 이를 발견한 삼개 사람들은 이상한 일이라고 여기고, 그 궤짝을 관가로 보냈다. 그리고 관가에서는 이를 다시 왕에게 올렸다.삼개에서 보내온 궤짝과 그 사연을 들은 인조는 "사람도 하나 없는 배가 삼개에 이른 것만 해도 정말 기이하고 신령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불경 궤짝이 중원의 개원사에서 판각하고 찍은 것이라니, 이는 반드시 인연이 있어 우리 나라로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혹시 우리 나라에 개원사라 불리는 절이 있는 지를 알아보도록 하라. 내가 보기에는 불경 궤짝 위에 쓰여진 글로 보아, 그 불경 궤짝을 우리 나라의 개원사에 보내 길이 보관하라는 뜻인 것 같다. 서둘러 개원사라는 절을 찾아보시오."라고 분부하였다.이에 개원사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절을 찾아보니, 광주 남한산성 안에 있었다. 그래서 인조는 그 불경 궤짝을 귀중하게 잘 싸서 남한산성의 개원사로 보냈다. 불경 궤짝은 한동안 별 탈없이 잘 보관되었다. 그런데 불경 궤짝을 보관하고 있던 개원사에 불이 나게 되었다. 절의 화약고에서 불이 일어나 절 전체가 타버릴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불길의 반대편에 거센 바람이 불어와 일순간에 불이 꺼져버렸다고 한다. 후에 다시 한 번 큰불이 나서 불길이 그 궤짝을 보관하고 있던 누각에까지 번진 적도 있었다. 이때 갑자기 하늘에서 큰비가 내리더니 무섭게 타오르던 불길을 덮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불경 궤짝을 보관하던 누각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두 차례나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 사람들은 불경 궤짝을 보관하고 있는 개원사를 부처님의 덕을 보고 있는 절이라고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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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남한산성의 서쪽 주봉인 청량산 정상부에 세워져 있으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건물은 남한산성의 지휘 및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어진 누각이다. 성내에 현존하는 건물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며, 2층 누각과 건물의 왼쪽에 2동의 사당인 청량당으로 이루어졌다. 이 건물은 선조 28년 남한산성 축성 당시 동남북의 3개 장대와 함께 만들어졌으며 유일하게 현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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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단층누각으로 축조하고 '서장대' 라 부르던 것을 영조27(1751)에 유수 이기진이 왕명으로 이층누각으로 증축하고 안쪽에는 무망루, 바깥쪽에는 '수어장대' 라는 편액을 내걸었으며, 서대라고도 불렀다. 수어장대의 하층은 정면 5칸, 측면 3칸, 상층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양식의 2층 누각이다. 지붕은 상하층 모두 겹처마루를 둘렀으며 사래 끝에는 토수를 달고 추녀마루에는 용두를 올렸으며 용마루에는 취두를 올렸다. 건물의 기둥은 높이 60cm의 팔각장주초석 위에 올려져있고, 포는 주심포 양식의 이출목익공식이다. 1층의 사방 1칸은 복도로 비워두고 정면 3칸, 측면 2칸만 장마루를 깔고 사방에 높이 45cm의 난간을 둘렀다. 2층은 1층 우측 뒷켠에 있는 사다리를 통하여 올라갈 수 있도록 하였다. 2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방에 판문을 달았으며, 판문에는 태극무늬를 그렸다. 천정은 연등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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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 내성의 가장 높은 곳, 즉 한봉외성으로 나가는 암문의 우측 언덕에 있는 건물 터로 해발 501m 지점에 위치한다. 동장대는 인조 2년(1624) 산성수축시 동장대가 설치되고 누각이 함께 건축되었다. 이곳에는 동서 21m, 남북 17m 정도 규모의 평탄지가 있으며 중앙에는 4개의 초석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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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의 외곽에는 높이 350cm 정도의 석축이 쌓여 있다. 수어청의 5영 중 전영장과 좌영장이 배치되어 진을 치고 휘하 장졸을 지휘하던 곳이다. 건물 지에는 와편과 잡석이 흩어져 있으며 주변에 비교적 높이 쌓은 석축이 양호한 상태로 남아 았다. 이곳은 숙종 때 외성이 확장되면서 외도장대와 함께 성곽의 동쪽에서 가장 높아 성곽 북쪽과 동쪽을 한눈에 감지 할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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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을 쌓은 팔도 도청섭인 벽암 각성대사와 함께 이회와 그의 부인의 영혼을 모신 사당으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 되어었다. 이회는 동남쪽 축성의 책임자로 충직한 인물인데 그를 시기한 무리의 모함으로 교수형을 당하였다. 그 후 이회의 무고함이 밝혀진 이후 수어장대 서쪽에 그와 부인의 영혼을 위안할 목적으로 청량당이 세워졌다고 한다. '청량당'이란 이름은 서장대가 서 있는 산이 곧 청량산이므로 산명을 당집이름으로 부른 것이며 '청량' 은 '맑고 서늘한 기운'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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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당은 서장대 서편 1단을 내려서 지어져 있다. 사당은 2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본당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를 두른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건물의 가구는 굴도리식이며 주심포 양식의 기둥을 하고 있다. 본당의 중앙에는 4쪽 여닫이 격자 문을 달고 좌 우측 칸에는 높이 175cm에 정면과 측면에 창문을 각각 내었다. 청량당 대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를 두른 맞배지붕 건물인데 좌 우측의 칸은 각각 격자 문을 달아 방으로 꾸몄고 출입문 중앙은 2쪽 여닫이 대문을 달고 문 위에는 홍살을 장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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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봉에 깃든 정기를 날려버린 청태종<산성설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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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장대지 동북쪽에 커다란 바위가 있다. 바위가 포개어져 가파르게 솟아 있고, 그 아래에는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틈이 나있다. 이 바위를 벌봉 또는 벌 바위라고 부른다. 옛날부터 벌이 이 바위에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해서 벌암, 벌바우, 벌봉이라 불렀다고 하며, 암문밖에서 이 바위를 보면 그 모양 또한 마치 벌과 비슷하다고 한다. 벌봉은 옛부터 영험이 있는 바위라고 해서 치성을 드리는 장소였다. 지금도 이 바위는 정기가 서려 있어 그 영험이 대단하다는 소문 때문에 치성을 드리러 오는 무속 신앙인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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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주변에는 제단도 따로 마련되어 있을 정도이다. 이렇게 영험하다는 벌봉에는 청태종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 청나라 태종(태종의 고모라는 이야기도 있다)은 용골대를 조선에 비밀리에 보내어 남한산성의 지도를 그려오게 하였다. 명을 받은 용골대가 남한산성에 도착해 보니, 남한산성은 하잘 것 없는 조그만 산성이었다. 그래서 구태여 세밀하게 조사하여 지도를 그릴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여, 대강 대강 지도를 그리고 청나라로 돌아갔다. 그런데 용골대가 그린 그림을 받아 본 청 태종은 용골대에게 강의 위치, 조선 도성의 위치 등을 자세하게 물어 보는 것이었다. 용골대가 대답하기를, "강은 산성 서쪽에 있고, 도성은 강 건너편에 있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청 태종은 크게 화를 내면서 꾸짖기를, "네 말과 같이 강과 도성이 서편에 있으면, 남한산성의 산세가 응당 남북이 길고 서북이 짧을 것이거늘, 네 어찌 반대로 서를 길게 하고 남북을 짧게 그려왔는가. 빨리 다시 그려 오라. 만약 명대로 하지 않으면, 네 목을 베겠다."고 하였다. 이에 용골대가 겁을 먹고 다시 조선으로 들어와서 남한산성의 성곽, 바위, 골짜기, 언덕 등을 빠짐없이 살피고 지도에 그렸다. 그리고 다시 청나라로 돌아가지도를 바쳤다. 청 태종은 용골대가 그려온 지도를 보고는 크게 기뻐하였다. 그리고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곳은 벌봉이라는 바위가 있는 곳이다. 이 바위는 천상 벽력성의 정기가 깃든 바위이다. 이 벽력성은 남극성이 범하게 되면 망하고 만다. 그런데 나의 주성이 곧 남극성이니, 만일 조선 국왕이 벌봉을 안에다 두고 성을 쌓았더라면, 우리 청나라가 쉽게 남한산성을 공격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벌봉이 성 밖에 있다. 장래에 우리가 조선을 공격하면 조선 국왕은 남한산성으로 피하게 될 것이다. 이때 우리 청나라 군사가 산성 밖에 있는 벌봉으로 가서 바위를 먼저 깨트리고, 벽력성의 정기를 말하면 산성을 쉽게 함락 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고는 조선 침략을 결정하였다. 마침내 청 태종은 조선을 침략하였고, 그의 예상대로 당시 조선의 임금이었던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 이에 청 태종은 군사를 이끌고 먼저 벌봉으로 가서 바위를 깨뜨렸다. 그랬더니 바위 위로 연기가 나면서 벌봉에 깃들었던 벽력성의 정기가 흩어져 마치 벌떼와 같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한달 후 청 태종은 남한산성을 공략하여, 마침내 인조의 항복을 받아 냈다. 후일에 나라에서 이 벌봉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는 다시는 임금이 무릎 꿇는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벌봉 밖에다 성을 재차 쌓았다고 한다. 지금의 벌봉이 마치 쪼개진 것처럼 틈이 벌어져 있는 것은, 병자호란 때 청태종이 벌봉에 어린 정기를 날려 버리려고 깨트렸던 자국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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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장대 앞 마당 한쪽 모퉁이에는 '매바위' 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매바위로 불리어지게 된 데에는 남한산성의 축성 책임을 맡았던 이회 장군의 억울한 죽음과 한이 깃들어 있다. 이회 장군은 남한산성을 쌓을 때 산성 동남쪽 지역의 공사에 완벽을 기하기 위하여 하나하나 철저하게 점검을 하며 공사를 진행하다 보니 그만 정해진 날짜를 넘기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공사비용 역시 턱없이 모자라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공사비용이 부족하게 된 이유가 이회 장군이 주색잡기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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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나라에서는 이회 장군에게 그 책임을 물어 참수형에 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서장대 앞뜰에서 이회 장군은 참수를 당하기 직전 하늘을 쳐다보면서 "내가 죽은 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죄가 있는 것이다" 라는 말은 남겼다. 그런데 실제로 이회 장군의 목을 베자, 이회 장군의 목에서 매 한마리가 튀어나와 근처 바위에서 슬피 울다가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멀리 날아가 버렸다. 사람들이 그 매가 앉았던 바위를 보니 매 발톱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장군의 말대로 이상한 일이 벌어지자, 사람들은 이회 장군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것이라 믿게 되었다.그리고 실제로 이회 장군이 책임을 맡았던 지역의 성곽을 살펴보니, 아주 견고하게 쌓아져서 빈틈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성곽 공사를 함에 있어서 부정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심혈을 다했음이 밝혀진 것이었다. 이후 사람들은 이회 장군의 목에서 나왔던 매가 앉았던 바위를 매바위라 부르고, 이 바위를 신성시하기 시작했다. 원래 이 매바위에는 실제로 매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어떤 일본인 관리가 남한산성을 둘러보다가, 바위 위의 매 발자국을 보고 참신기한 일이라 여겨서 그 매 발자국이 찍힌 부분을 도려내어 떼어 갔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그 일본 관리가 떼어갔음을 말해주는 사각형의 자취만 남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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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행안내1. 산행일시 : 2008년 1월 27일<일>2. 만남의 장소 및 시간 : 전철5호선 마천역 1번 출구내 / 오전 10시 30분3. 등산코스 : <약 6시간>
<마천역 - 등산로 3거리 - 호국 사자사 - 유일천약수터 - 일장천약수터/체육시설 - 5번등산로 -
서문 - 청량당 - 수어장대 - 남문 - 제2남옹성 - 동문 - 장경사 - 장경사신지옹성 - 동장대(터) -
동장대암문 - 벌봉 - 동장대암문 - 북문 - 연주봉옹성 - 서문 - 3번등산로 - 호국 사자사 - 마천역>
4. 준 비 물 : 겨울용등산복, 아이젠, 중식, 식수, 장갑 등등5. 기 타 :
* 참석자<강존훈, 강장호, 문경탁, 박제순, 이창성, 임영준, 그리고 나> --- 이상 7명
어느듯 1월도 마지막 주가 지난다.엊그제 새해가 시작되는가 했더니 벌써 1월이 흘쩍 지나는가 보다.겨울이 가기전에 한번 친구들과 함께 남한산성 탐방을 해 볼까 작정을 하고 있다가 오늘에야 이곳을 찾게 되었다.나는 지난 여름 혼자서 남한산성을 종주 산행했었다.서울 근처에 있으면서도 찾기가 그리 쉽지 않은 곳, 그리고 낮은 산이라 생각하여 찾지 못했던 사람들이 많은 곳이다.한겨울이 지나면서 오늘은 유난히 포근하고, 하늘은 대단히 맑다.
어제 고향에 다녀온 후, 늦게 귀가하여, 아침에 일찍 일어나려니 약간 피곤했다.그렇지만 내가 좋아하는 산이기에,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간단히 아침식사를 마치고, 산행준비를 한다음, 근방에 있는 5호선 화곡전철역으로 가는 길에 김밥집에서 참치주먹밥을 세개 샀다.그리고 컵 라면 한개하고....버스를 타고 화곡전철역으로 가서 마천역까지의 전철 시간을 알아보니 대략 1시간 24분이 소요되는 거리였다.아침 시간대라 그런지 5호선 전철에는 텅빈 자리가 많았다.전철은 마천역까지 가는 동안 편히 갈 수 있었으며, 종점인 마천역에 도착하니 마침 제순이가 같은 전철에 타고 있었다.마천역에 도착하여 1번 출구로 나가보니 일찍 도착한 친구가 있었다.다리를 다쳐 그동안 함께 산행에 참여치 못했던 영준이가 나와 있었고, 장호후배도 일찍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었다.친구들이 도착할려면 지금도 30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마천역 주변에는 수많은 등산객들이 팀을 이뤄 남한산성 산행을 위해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과 먼저 출발하는 사람들로 주변은 붐빈 상태였다.이곳 남한산성 산행에 참여하는 등산객들이 이렇게 많을 줄 전혀 몰랐다.산은 높고 낮음을 떠나서 모든 산이 다 좋다.마천역에서 기다리는 동안 종훈, 창성, 경탁이가 도착함으로써 오늘의 산행 참가자는 다 왔다.그런데 산행에 참여하고 있는 친구들이 오늘의 산행에 대해서 준비가 없었던 모양이다.남한산성 산행은 짧게 이루어지는 줄 알고 기대했던 모양이다.특히 다리에 약간의 고통을 받고 있는 영준이와 경탁, 그리고 짧은 산행인줄 알고 준비가 덜된 종훈 등등 사전에 충분히 검토하여 참여했어야 되는데....여하튼 산행스케줄에 대하여 나름대로 자세히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준비했으리라 생각했는데...여하튼 오늘의 남한산성 산행은 종주다.
마천역에서 출발하는 산행코스는 잘 모른다.물론 자료를 읽어 준비는 했지만, 이곳의 산행은 제순이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남한산성의 서문 입구까지는 제순이가 가이드 하기로 결정하다.마천역 1번 출구로 나와 곧장 도로변으로 나가든지 아니면 좌측의 골목길을 따라 오르다가 우측으로 향하면 다시 만나는 차도가 된다.차도에서 좌측으로 곧장 올라가면 삼거리에서 직진 좌측편에 버스종점이 있고, 곧장 직진으로 향하면 시장터처럼 보이는 식당가를 지나게 된다.식당가를 지나다 보면 정중앙에 <몽블랑물류센타>가 자리하고 있다.산행선택은 좌측으로 오르든지 아니면 우측으로 오르든지 다 가능하다.좌측의 코스는 아마도 연주봉옹성의 바로 옆 등산로로 올라가는 코스인듯 하고, 우측으로 곧장 오르면 호국 사자사를 지나 또다시 코스를 선택해야 한다.일행들은 우측의 호국 사자사 코스를 택하여 오른 후, 유일천약수터가 있는 4번 등산로를 택하여 산행에 임하다.호국 사자사를 지나자 차도에는 눈이 쌓여 있어 눈길이 되고 있었고, 4번 등산로로 들어서면서 겨울산을 느끼게 등산로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그렇지만 올라가는 산행이기에 아이젠을 착용하지 않고 산길을 오르기 시작하다.이곳을 처음 찾아보는 코스이지만, 어떠한 모습으로 산길이 되어 있는지 잘 몰랐다.산행 초입에 들어서기전 산행안내도를 확인한 후 산길을 택하여 서문으로 향하기 시작하다.서문으로 가는 4코스가 있었다.그렇지만 일행들은 4번 코스를 택하여 오르다가 5번으로 향했다.5번 우측의 등산로를 따라 지나기가 별로 좋지 않았다.5번의 등산로는 대단히 가파른 오르막 깔닦구간이다.이 길만 올라서면 성곽을 끼고 산행길에 나서게 된다.
<전철 5호선 종점인 마천역 1번 출구>
<1번 출구에서 나와 좌측의 길목도로를 따라...>
<1번출구에서 좌측으로 올라가면 막히는 지점에 있는 상점. 이곳에서 우측 차도를 향하여....>
<골목길에서 나와 바라 본 풍경. 좌측의 차도를 따라 곧장>
<곧장 진행하면 삼거리 바로 앞 좌측편에 버스 종점이 있다. 버스종점 옆 즉 직진 방향으로 직행>
<좌측 버스종점 앞을 지나면서....식당가를 통과하면>
<이곳에서 연주봉옹성은 몽블랑에서 좌측으로, 서문을 향하려면 우측의 방향으로 직행>
일행들은 우측의 호국 사자사가 있는 곳으로 서문을 향하여 나아가다.
주변에는 온통 등산구점들로 상가를 이루고 있었다.
얼마나 저렴한지는 몰라도....
<우측의 호국 사자사를 지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