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 산행일지 ★★

<2>회암교버스정류장-회암사-무학대사부도-천보산-장림고개-칠봉산-지행역

疾 風 勁 草 2010. 11. 13. 10:18

 

<회암사 앞에서...>

 

회암사에 도착하니 좌측으로 약수터가 자리하고 있었고, 직진 방향으로 난간을 올라서니 좌측으로 아담한 회암사와 더불어 뒤쪽으로 천보산 앞쪽의 기암 봉우리가 자리하고 있었다.이곳에서 사찰내를 둘러본 후 두 갈래 등산로가 있었다.좌측으로 오르면 전각왕사비가 있는 곳이고, 우측으로 향하면 무학대사 부도가 있는 곳이다.일행들은 이곳을 둘러본 후 우측의 무학대사 부도가 있는 곳을 향하여 둘러 본 후 정상으로 향할 작정이다.

 

<회암사 대웅전 앞에서...>

<회암사 삼청각>

 

 

 

 

 

 

 

 

<좌측의 무학대사쌍사자석등과 우측의 무학대사홍융탑>

 

* 무학대사홍융탑(無學大師洪融塔) - 보물 제388호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활동한 승려인 무학대사(1327~1405)의 부도로 조선 태종 7년(1407년)에 건립되었다.부도(浮屠)는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모신 탑 무덤(묘탑, 墓塔)이다.부처의 사리를 모신 탑은 경배의 대상이나 부도는 예배의 대상이 아니며, 보통 절의 경내 외곡 지역에 위치한다.우리나라에서는 9세기경 통일신라 후기 이후에 선종의 발달과 더불어 고승 신앙의 한 형태로 부도가 크게 유행하였다.

 

* 쌍사자석등(雙獅子石登) - 보물 제389호무학대사 부도 앞에 세워져 있는 이 석등은 전체적으로 평면이 사각형의 형태로 간주석에 두 마리의 사자가 배치되어 있어 쌍사자 석등이라 불리고 있다.석등은 등불을 놓아두는 곳으로 주로 불전 앞에 세웠다.불교에서는 죽은 이를 위하여 탑묘 앞에 등불을 밝히면 다시 태어나 청정(淸淨)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더불어 등불을 밝히는 것을 공양 중에서도 으뜸으로 여겼으므로 공양도구로 제작되었다.

 

 

 

 

<무학대사비>

 

* 무학대사비(無學大師碑)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1호조선초 태조의 왕사였던 무학대사 자초(自超)의 비이다.고려 말 조선 초의 3대 화상으로 유명한 지공, 나웅, 무학의 부도가 있는 회암사 터에 세워져 있는 이 비석은, 조선 태종 10년(1410년) 왕명에 따라 변계량(卞季良)이 글을 짓고 공부(孔부)가 글씨를 써서 세워졌으나 순조 21년(1821)에 인위적으로 파괴되어 후에 다시 세워졌다.자초는 18세에 승려가 되어 용문산의 혜명에게 불법을 배운 후 묘향산 금강굴 등을 찾아 수도하였다.고려가 멸망한 후 1392년 태조 이성계는 자초를 왕의 스승인 王師로 책봉했고, 묘엄존자(妙嚴尊者)라는 칭호를 붙여주었다.자초는 태조가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지공선사 부도 및 석등>

 

* 지공선사 부도 및 석등 - 경기도 유형문화제 제49호

회암사는 고려 말 조선 초에 선종의 맥을 형성했던 승려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이 머물며

포교했던 곳으로 유명한 절이다.

절의 동쪽 능선에 세 승려의 부도가 있는데

그 중 가장 위쪽에 있는 것이 나옹의 부도와 석등으로 고려 우왕 21년(1372)에 건립되었다.


 

 

 

<나옹 선사 부도와 석등>

 

* 나옹선사 부도와 석등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0호

고려 후기의 승려인 보제존자 나옹의 부도와 석등이다.

부도는 승려의 사리를 안치한 건조물로 우리나라에서는 9세기경인 통일신라 후기에

선종의 발달과 더불어 고승신앙의 한 형태로 크게 유행하였다.

부도의 구조는 몸돌을 받치는 기단부와 몸돌 위에 있는 지붕돌, 상륜부로 이루어져 있다.

석등이란 어둡고 깜깜한 중생의 마음을 부처님의 깨달은 진리로 비추어서 佛性을 밝혀주는 법등이다.

대개 절의 중앙에 배치되지만 나중에는 승려들의 무덤인 부도 앞에도 세워지게 되었다.